
전작에서 너무 깊은 감명을 받아 신간을 읽었는데 이 책은 단순히 제품이나 디자인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다루고있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집중하기가 좀 힘든 책이었다.
전작들에서 정의한 좋은 디자인의 개념을 사용자를 위한것에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확대하여 드디어 인류로 확장 시켰다. 애플의 초기 디자이너로써 명성을 누린 저자가 본인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회, 정치, 인류, 역사, 인지심리, 심지어 제품개발 방법론까지 미시적인 부분부터 거시적인 관점까지 정말 많은 지식을 쏟아냈다.
이 책은 디자인에 대한 기존 관념을 철저히 해체하고 인간 행동, 사회 구조, 시스템,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디자인의 재정의’를 시도한다. 저자는 책의 첫 장부터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인위적으로 설계된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디자인은 어느새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삶을 감싸고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통제’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하고있다.
저자는 우리가 믿는 ‘역사’조차 디자인된 것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승자의 기록으로 남은 역사 속에서 진짜 인간 중심 디자인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자연스럽다고 믿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당연한 일상’을 무너뜨리며 자정 능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2부와 3부에서는 이러한 인위적인 구조 안에서 인간과 시스템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탐색한다. 분업과 효율성 중심의 산업화는 소비자가 제품의 기원이나 영향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들었고, 이는 무분별한 소비와 환경 파괴로 이어졌다. 우리가 쓰는 일회용 컵 하나도 사실은 글로벌 시스템 안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폐기하는 복잡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저자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기술과 정책, 인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정의한다. 이로써 디자인은 단순한 기능 창조를 넘어, 인간 행동과 사회 구조를 조율하는 핵심 기제로 확장된다. 4부에서는 ‘인류 중심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인간 중심’을 넘어서 지역, 세대, 환경, 생태계까지 고려하는 새로운 디자인 철학이다. DIY, 해커 문화와 같은 사례를 통해 디자인의 민주화 가능성을 조명하면서도, 이 방식이 현실적으로 갖는 제약들(자금, 시간, 복잡한 절차) 도 냉철히 지적한다. 그러나 점진적이고 모듈화된 방식이야말로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단순화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임을 강조한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가 실천 중인 애자일 개발 방식이 바로 이러한 점진적, 협력적 변화에 적합하다는 점이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단위로 쪼개어 반복하고 개선하는 과정은 기술 개발만이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 책은 디자이너의 역할을 확장시켜, 단지 ‘기술을 멋지게 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적 전환을 주도하는 촉진자’로 재정의한다. 특히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힘,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감각,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는 자세를 디자이너의 본질로 삼은 점이 깊이 공감되었다.
5부에서는 인간 행동의 보수성(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단기 편익을 중시하는 성향)을 냉정하게 진단했다. 디자이너는 이러한 인간 심리를 이해하고, 강요보다는 공감과 참여를 통해 변화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재난에는 반응하지만, 재난 예방에는 무관심하다”는 문장은 (33장의) 실행 방법이 왜 현실에서 어렵게 느껴지는지를 설명해준다. 디자인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시스템 속에서 오류 없는 인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작업 중 딴생각이 ‘인간적인 특성’이며, 이는 결함의 원인이 아니라 디자인의 실패일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특히 일상 업무를 돌아보게 했다.
6부에서 말하는 ‘디자인 행동’은 결국 집단적 변화의 일부로서 디자인을 실천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문제 해결을 넘어서 시스템을 바꾸고, 사용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 미래 세대까지 고려하는 디자인 윤리가 필요하다. 이는 결국 교육, 협업, 제도적 뒷받침과 맞물려야 하며, 디자이너는 이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균형을 잡는 촉진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전작 “사용자 중심 디자인” 에서 기술을 사용자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는 디자인 그 자체를 인간성과 사회 시스템의 중심으로 옮겨놓았다. 우리가 기술을 얼마나 잘 만드는가를 넘어, 그것이 어떤 사회를 만드는가를 묻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기술의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세상에 어떤 파장을 남길지 더욱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세상은 디자인의 결과물이 아니라, 디자인 그 자체의 철학과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인류가 소비로 많은 이익을 누린만큼 이제는 각자의 삶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세심하게 살펴볼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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