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보편적 상식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인가, 누군가의 이익이 모두의 평안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역사책에서 만난 제국주의와 냉전시대에나 있었던 일들이 21세기에 일어나다니 나름 평화의 시대(역시적으로 따져봤을 때 수치적으로는)에 살던 내게는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트럼프가 재선되었다. 도대체 그의 지지층은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궁금해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러닝메이트이자 정권의 부통령이 최연소에 백인 로스쿨 출신에 작가이며 그가 쓴 책이 영화화까지 된 것을 알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 혹시 트럼프의 주지지층이라는 백인 노동자층을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주말마다 광화문을 메우고 있는 그 사람들을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폈다.
이 책의 타이틀에 힐빌리란 단어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 벨트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사양화된 공업지대)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백인 쓰레기라는 화이트 트래시, 햇볕에 그을려 목이 빨갛다는 데서 유래된 교육 수준이 낮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미국의 시골 백인을 가리키는 모욕적 표현인 '레드 넥' 등도 사용된다고 한다. (1p)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18세기 첫 번째 이민의 물결을 타고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인 할보와 할모 (할아버지와 할머니) 와 그의 가족들이 애팔래치아산맥의 켄터키주 잭슨으로 이주한다. 이들은 대공황 이후 1940~1950 년대에 켄터키주 잭슨에서 벗어나 오하이오 미들타운으로 이주했다. 육체노동자로 살며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나 그들의 자녀들은 (이 책의 주인공인 벤스의 부모님 세대) 여전히 행복과는 먼 삶을 산다. 손자 세대인 벤스의 세대 역시 최 빈민층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폭력적인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벤스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가족들의 지지와 중요한 시기마다 나타난 귀인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 (저자의 표현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변호사까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개인의 성공담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글 곳곳에 힐빌리의 환경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의 역사들이 곳곳이 묻어있다.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이민자들은 차별받던 흑인, 끔찍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라틴계 이민자들만큼 비극적인 삶을 살진 않았지만 가장 염세주의적인 집단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우울한 어린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때부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계층 간의 분화를 깊이 느끼게 되었고 부를 가진 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빈곤층을 향한 분노가 동시에 커졌다고 한다. 쥐꼬리만한 급여에 연방 소득세와 주소 득세가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그 세금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아 술과 마약에 빠지는 이웃이 늘어나는 현실 사이에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공화당 대통령의 연방정부 정책으로 내 집 마련 후 집값이 떨어져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을 통해 정부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 있다.
"지미 카터 정부 시절의 '지역재투자법' 에서 조지 W. 부시 정부의 '오너십소사이어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연방 주택 정책은 꾸준히 '내 집 마련'을 부추겼다. 그러나 정부의 말을 믿고 내 집을 마련한 미들타운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88P)
"저런 빈대 같은 놈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술 처마시고 휴대전화도 쓰는데, 왜 평생을 일한 사람들이 근근이 먹고 사는지 이해가 안된단말이야 (223P)" (제 8조 프로그램 : 미국 주택법 제 8조에 따라 저소득층의 주택 임대료를 70퍼센트까지 정부에서 지원하는 정책.)
"한때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었던 애팔래치아 산맥과 남부 지역 사람들이 어째서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충실한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많은 정치학자가 무던히 애를 썼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시민 평등권 운동을 포용한 민주당을 탓하며 인종 관계를 지적하기도 했고, 사회보수주의가 해당 지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종교적 신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를 이루는 견해는 수많은 백인 노동자가 내가 딜먼에서 본 것과 똑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1970년대 누구의 말마따나 복지 제도에 기대 놀고먹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돈을 받으며 사회를 비웃는다! 우리 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있다!”라는 인식이 백인 노동 계층 사이에 팽배해지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235P)
"힘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우리를 도우려고 할 대가 있다는 것이다." (292P)
사실 특정 당에 대해 치우친 글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과 비판을 나타낸 것 같다. 위 언급을 보면 비단 민주당에 대한 비판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글을 썼을 때는 아직 그가 트럼프와 페이팔의 부역자가 된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현재 공화당 이단아의 부통령이다. 그는 트럼프의 열혈 지지자인 피터 틸이 운영하는 페이팔에 들어가면서부터 트럼프의 지지자가 되었다. 한때 민주당 지지자였던 그가 현재 미국 경제를 뒤흔드는 페이팔의 창립 멤버들과 도대체 어떤 미래를 약속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분명히 "옵서버"지의 서평처럼 "훌륭하다! 수많은 유권자가 공화당의 이단아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원인을 예리하게 관찰했다"라는 말의 근거가 될 만하다.
사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어린 날의 벤스에 이입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해병대로 근무하며 점점 고립에서 벗어나는 벤스가 너무 기특했고 해병대 근무 중 돌아가신 할모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함께 맘이 아팠다. 처절한 경험이 투영된 책이 특정 정당을 색안경을 끼고 보게 하는 데에 쓰이게 되어 개인적으로 몹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대안 없이 비판만 늘어놓는다거나,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다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너무나 싫어한다. 가족인 힐빌리들의 지지 속에서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돌파해 나간 그는 "오늘날 힐빌리의 문제를 만든 건 정부도 기업도 아닌 힐빌리가 만들었으므로 힐빌리가 해 결해야 한다."(393P)라는 언급을 했다.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분명히 어떤 희망과 해결의 실마리를 봤을 텐데도 이런 결론을 낸 그가 조금 아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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